['경성크리처'] 누가 그들을 용서하려 하는가



 

흔히 우리는 용서를 미덕으로 여긴다.

은촛대를 훔친 장발장에게 왜 은접시는 안가져갔느냐면서 따뜻하게 용서하는 미리엘 신부의 이야기는 <레 미제라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그것은 아마도 용서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쉽지 않은 결정이기에 용서는 용서받는 상대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가졌다. 실제로 미리엘 신부가 베푼 뜻밖의 용서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으로 피폐해진 장발장의 마음을 녹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그 이후 장발장은 선한 인간의 길을 걷게 된다.

용서가 매력적인 것은 상대 뿐만 아니라, 용서를 하는 자신에게도 득이 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용서를 함으로써 숙명처럼 품고 있던 과거를 내려놓는 경우가 많다. 불행했던 과거의 아픔을 마음 편하게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용서는 잊고 싶은 어두운 과거를 끊어내고 밝은 미래를 추구하려는 자연스러운 인간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이 인간에게 준 망각의 축복은 어쩌면 용서라는 멋진 명분으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아름다운 용서이지만, 용서가 진짜 용서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음 두 가지를 만족해야 한다. 요건을 만족하지 못한 유사 용서는 미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억압이자 폭력이다. 

첫째, 용서받는 사람의 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 피해에 대해서 충분히 배상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과거의 잘못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그것만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의 자세이고, 용서받는 사람의 자세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반대인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학교폭력을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2022~2023)>처럼 피해자는 평생 잊지 못하는데, 가해자들은 발뻗고 자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둘째, 용서하는 사람의 자격이 있어야 한다. 용서는 피해를 입은 당사자만이 해줄 수 있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여전히 말이 많은 것은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위안부 강제동원 책임을 면제해 줄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는지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 징용되고 위안부에 끌려갔지만 당시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국가는 적어도 한반도에는 없었다.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은 엄연한 용서의 행위이다. 당시 피해입은 할머니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데, 어느 누가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용서할 수 있을까. 우리 정부는 일제의 만행으로 피해입은 사실이 없으므로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일제가 저질렀던 인간생체실험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 <경성크리처(Gyeongseong Creature, 2023)>는 용서의 관점에서 '왜 우리는 일본을 아직 용서해서는 안되는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나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어째서 너희들은 그리 당당한 것이냐? 내 어머니를 유린하고 한 가족의 행복을 짓밟고 무고한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여놓고도. 어찌 그리 뻔뻔할 수가 있는거지? 업적? 그런 식으로 미화하고 포장한다고 당신들의 죄까지 지워질까? 아닌 척한다고 당신들의 그 치졸한 열등의식을 감출 수 있을까?"

- 채옥이 가토 중좌에게-

 

최근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 일본에 대한 정당한 비판까지 정치 프레임으로 덮어씌우려 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 민족을 유린하고, 우리의 행복을 짓밟고, 무고한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인 나라, 그럼에도 여전히 뻔뻔하고 우리의 땅까지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그런 나라가 용서받을 자세가 되어 있느냐고. 그리고 정작 피해자들은 배제한 채 자격도 없는 정부가 그들을 용서해줄 자격은 갖추었냐고.  

과거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모든 것을 보이콧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미래를 향한다고 모든 과거를 지울 필요도 없다. 아니 지워서는 안된다. <공생론>이 근거하는 팃포탯(Tit for Tat)에 따르면 상대의 배신에 대한 즉각적이고 강력한 응징은 필수적이다. 상대가 협력의 자세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그 조치는 지속적이고 일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보복을 멈추는 것은 오로지 상대의 반성과 용서를 구하는 자세에 달려있다. 참고로 팃포탯은 게임이론 모델에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전략으로 확인되었다. 물리적, 심리적으로 가깝고 오래 유지되는 관계일수록 결과론적으로 팃포탯 전략이 갈등을 최소화하고 상호간 협력과 공생의 길로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닌가?", "적당히 좀 해라. 언제까지 그럴래?", "과거에 집착하지 좀 말고 미래를 생각해."는 용서받을 자세가 되지 못한 가해자들에게 쏟아낼 말이지, 얼마든지 협력하고 싶고, 협력하고자 하는 피해자들에게 되물을 말은 아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인다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 그 말인즉슨 용서의 조건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를 할 수도 있지 않은가가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는 하면 안된다. 이것은 친일, 반일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누가 어리석게 일본을 용서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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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 12. 까지 총 0회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