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땅에는 신이 없다'] 죽기 싫으면 뭉쳐야 한다



 

아래 글은 넷플릭스 드라마 '그 땅에는 신이 없다'(Godless, 2017)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래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는 이 곳이 살기 힘든 곳이라고 푸념하곤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2023년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롭고 평화로운 순간임에는 틀림없다. 73년전 6.25 전쟁 이후로 한반도에서는 지금까지 전쟁이 없었으며, 군사 독재는 겪었지만 이제 대통령을 흉봐도 뭐라하지 않는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나름의 번영을 이루어 당당히 자타가 인정하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모든 것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마땅히 우리가 누려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럴 자격이 충분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세상의 모든 진리가 말해주듯 당연한 것은 없다.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 우리를 향해 영원히 미소지을 것 같은 눈부신 희망을 잠시 거두어보자. 잠깐 상상해보는 것이다. 어떠한가. 그러한 세상은 어떻게 펼쳐질까. 내가 사는 이 곳이 만약 그렇다면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19세기 미국 서부의 어느 작은 광산 마을 라벨이 그런 곳이었다.

얼마 전 광산에서 발생한 사고로 광산에서 일하던 마을의 남자들은 모두 죽었다. 마을에 살아남은 남자는 보안관들과 주정뱅이뿐. 총이 느리면 총에 맞아 죽고, 발이 느리면 인디언들에게 잡혀 죽는 무법의 시대. 오직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날것 그대로의 폭력 사회에서 아이들과 여자들만 남아 마을을 지켜야 한다.

그런 마을에 한 남자가 부상을 입고 숨어든다. 그 이름은 로이 구드. 인디언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아들과 함께 사는 과부 엘리스 플레처는 다친 로이를 몰래 숨겨준다. 원래 회복되는대로 떠나기로 했으나, 말을 길들이는 재주가 있었던 로이는 당분간 목장에 머물며 엘리스를 돕기로 한다. 그런데 로이 때문에 마을은 큰 위험이 닥치고 있었는데, 로이가 잠시 몸 담았던 프랭크 그리핀의 조직이 조직을 배신한 그를 쫓고 있었던 것. 프랭크의 조직은 악명이 높아서 로이를 도운 마을은 어린아이까지 몰살시키고 있었다.

이제 라벨은 다가오는 위기에 대응해야만 한다. 군대에 도움을 청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마을을 두고 떠날 수도 없다. 오직 마을 사람들과 로이 구드의 힘만으로 이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누가봐도 최악의 상황. 답이 없어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프랭크 그리핀의 조직이 조금씩 마을에 가까워지는 내용 전개는 긴장감이 상당하다.

평범한 광산마을을 약탈하려는 무법자의 무리라면 흔한 서부극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감독은 남자가 없는 마을이라는 설정으로 처음부터 작정하고 힘의 균형을 깨뜨려버렸다. 로이 구드가 타고난 총잡이이긴 하지만, 무법자 무리와 정면 승부할 수는 없다. 관건은 개인별로는 한없이 약한 마을 주민들이지만, 얼마나 효과적으로 뭉쳐서 그 시너지를 내는가다. 이미 뻔하게 기울어져 버린 운동장임에도 우리가 기꺼이 몰입해서 보는 것은 선과 악이 뚜렷한 구도에서 그래도 신은 선한 사람들의 편이 아닐까하는 한 줄기 희망 때문아닐까. 미드의 제목이 '그 땅에는 신이 없다'(Godless)임에도 마음 한 켠에서 신(神)을 믿고 선(善)을 찾는 것은 분명한 아이러니다.

마을 여인들은 호텔을 근거지로 삼아, 프랭크 무리와의 최후의 결전을 준비한다. 여기에는 지주도, 매춘부도, 가정주부도 따로 없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총 한 자루로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로이가 나름 활약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개인 한 사람은 약했지만, 한 몸으로 뭉쳐서는 프랭크의 무리를 능가했다.

스토리가 반전이 있거나, 복잡하지 않아서 좋았다. 교훈적인 요소를 일부러 드러내거나, 신파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가오는 변화를 앞두고, 한 몸으로 뭉치는 모습. 당연한 것이지만, 당연하게 실천하긴 어려운 공생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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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2. 29. 까지 총 0회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