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와 동양의 군자(君子)',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사진출처 : 우구리님의 브런치)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사진출처 : 우구리님의 브런치)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되고자 했던 갈망은 늘 존재해 왔습니다. 외부의 격동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Apatheia)을 지향했던 스토아학파의 '현자'나, 인위적인 규범을 벗어나 대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긴 도교의 '진인(眞人)' 그리고 유교 문화권인 우리에게 특히 익숙한 ‘군자(君子)’가 그러한 존재일 것입니다.

오늘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와, 동양의 유교 전통에서 이상적 인간상으로 추앙받는 '군자(君子)'에 대해서 비교해볼까 합니다. 이 둘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른 점이 분명히 존재하므로, 비교해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위버멘쉬: 파괴를 통한 창조적 주체

먼저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기존의 모든 가치 체계가 붕괴된 허무주의(Nihilism) 시대를 진단했습니다. 이 허무의 늪에서 인간을 구원할 유일한 존재가 바로 위버멘쉬입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위버멘쉬로 향하는 인간 정신의 진화 단계를 세 가지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 정신은 낙타와 사자 그리고 아이 순으로 변화한다고 한다 (사진출처 : BabyLionCamel님의 블로그)
니체에 따르면 인간 정신은 낙타와 사자 그리고 아이 순으로 변화한다고 한다 (사진출처 : BabyLionCamel님의 블로그)

첫째, 낙타입니다. 낙타는"너는 해야 한다"는 기존 관습과 도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걷는 단계입니다.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의무에 순응하며 인내하지만, 자신의 의지는 없습니다. 취직하고 퇴직할 때까지, 출근할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똑같은 일상을 무기력하게 보내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의 삶과 많이 닮았습니다.

둘째, 사자입니다. 사자는 "나는 하고자 한다"고 외치며 자유를 챙취하는 단계입니다. 낙타의 등에 실린 '의무'라는 짐을 떨쳐버리고, 기존 가치를 부정하며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투쟁합니다. 그러나 사자는 부정할 줄만 알 뿐, 새로운 가치를 세우지는 못합니다. 맹목적으로 공인된 가치를 쫓는 무기력한 삶이 아닌 자신만의 가치를 쫓는 자신만의 삶을 찾아 투쟁하지만, 이것은 기존 질서를 부정하면서 오는 반동의 에너지일 뿐, 새로운 가치 추구가 끌어당기는 힘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아이입니다. 아이는 망각이자 새로운 시작, 유희입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즐기며, 어떤 외부 기준 없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단계입니다. 어른들의 눈에 볼 때는 지루해보이기 짝이 없는 행동도 아이들에겐 하루 종일 놀아도 질리지 않는 놀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의 궁극적 상태입니다.

위버멘쉬는 이처럼 현재의 자신을 끊임없이 극복하는(Self-overcoming) 존재입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극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유희처럼 즐기면서 놀이하듯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위버멘쉬의 삶에 기쁨과 행복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위버멘쉬는 고통과 환희가 뒤섞인 가혹한 운명조차 사랑하며, 설령 이 삶이 영원히 똑같이 반복된다 할지라도 기꺼이 "다시 한번!"이라고 외칠 수 있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의 긍정을 가지는 존재라고 니체는 이야기합니다.

동양의 군자: 도(道)를 체현하는 조화로운 인격자

군자는 공자가 제시한 이상적인 유교의 인간상입니다. 공자는 군자를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도덕적 완성을 이룬 자'로 이해합니다. 공자가 가진 군자관의 핵심은 자신을 먼저 닦고(修己), 그 뒤에 타인을 편안하게 하는(安人) 데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고 안위를 살피고 싶어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군자 역시 이상적인 존재입니다. 이와 달리 나와 우리가 가진 일반적인 사람의 모습은 '소인(小人)'이라고 불렀습니다. 군자와 소인을 비교함으로써 군자는 어떤 존재인지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한 가지 용도로만 쓰이는 그릇처럼 고착되지 않고 보편적 가치를 지향합니다. 반면 소인은 눈앞의 이익과 기능에만 매몰됩니다.

의(義)와 이(利): 군자는 의로움을 먼저 생각하고(喻於義), 소인은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喻於利).

태이불교(泰而不驕): 군자는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으며, 소인은 교만하되 태연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군자는 자신의 행동과 마음 자세에 대한 롤모델을 갖고 있습니다. 그 롤모델은 하늘(天)입니다. 군자는 우주의 질서이자 도덕적 근거인 '천명(天命)'을 경외하며, 그 순리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려 노력합니다. 즉, 군자는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쫓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부여한 도덕적 사명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의 모든 행위는 사사로운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천리(天理)라는 절대적 기준에 따라 정당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상은 공자와 맹자를 계승한 명나라 철학자 왕양명(王陽明)에게서 더욱 구체화됩니다. 그는 《전습록(傳습錄)》에서 "양지는 곧 천리다(良知卽是天理). 그것이 사람의 마음속에 작용하여 스스로 비추는 것이니, 이를 일러 천명이라고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군자가 자신의 마음속 준칙인 '양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곧 하늘의 명령에 따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내면적 양심이 우주의 보편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강력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위버멘쉬와 군자의 공통점 (현실에서 역경을 이겨내며 스스로를 이기는 자)

두 모델은 비록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주체적인 삶'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이것은 세 가지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구글 제미나이(Gemini)가 그려준 "현실에서 역경을 이겨내며 스스로를 이기는 자....?"
구글 제미나이(Gemini)가 그려준 "현실에서 역경을 이겨내며 스스로를 이기는 자....?"

첫째, '자기 극복'의 과정이 일치합니다. 위버멘쉬는 어제의 나를 파괴함으로써 존재하고, 군자는 매일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실천합니다. 둘 다 정체된 상태가 아닌 역동적인 '과정'으로서의 인간을 말합니다.

둘째, 시련에 대한 태도가 일치합니다. 니체가 고통을 "정신을 단련하는 용광로"로 보았듯, 공자 또한 《논어》 자한(子罕)편 에서 말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論語 子罕 27章)"**라는 문구를 통해 역경 속에서 더욱 단단해지는 내면의 힘과 절개를 강조했습니다.

셋째, 현실의 긍정이 일치합니다. 위버멘쉬는 내세를 부정하고 '대지의 뜻'에 충실합니다. 군자 역시 죽음 이후의 세계보다는 "사람도 다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는가"라며 지금 현재 삶에서의 윤리적 실천을 중시합니다.

위버멘쉬와 군자의 차이점 (가치의 근원, 사회적 관계 맺기, 새로운 가치)

하지만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하는데요.

첫째, 가치의 근원이 개인의 의지인가 아니면 보편적 질서인가의 차이입니다.


위버멘쉬의 가치는 외부의 어떤 초월적인 신이나 객관적인 도덕 법칙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힘에의 의지'를 통해 스스로 발명해내는 것입니다. 그는 기존의 모든 가치를 전도시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입법하는 주체가 되며, 이 과정에서 타인의 평가나 사회적 관습은 극복해야 할 재료일 뿐 결코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반면, 군자의 가치는 '도(道)'라는 보편적 원리의 발견에서 옵니다. 도의 근거는 하늘입니다. 왕양명 역시 마음 속 양지를 이야기하지만, 그 양지의 근거는 하늘에 있음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즉, 동양의 군자는 스스로 법을 만들기보다, 우주의 영원한 법도를 내면화하는 이입니다.


둘째, 사회적 관계 맺기에서도 두 모델은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기존의 낡은 가치를 부수고 새로운 입법자가 되기 위해 '시장의 파리들'이라 불리는 군중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그에게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노예 도덕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의지에 집중할 수 있는 필수적인 창조적 공간입니다. 그는 별처럼 높이 솟아올라 홀로 빛나며, 자신과 대등한 수준의 소수와만 교감할 뿐 대중과의 융화를 거부합니다.

반면, 군자는 공동체 속에서 타인과 화합하되 맹목적으로 휩쓸리지 않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미학을 지향합니다. 군자는 자신을 닦는 수양(修己)을 통해 얻은 덕성을 가족과 국가, 나아가 천하로 확장시키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그의 완성을 향한 여정은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禮)를 통해 질서를 세우고 인(仁)을 통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인륜(人倫)의 질서를 완성하는 길로 이어집니다. 위버멘쉬가 산 정상의 고고한 바위라면, 군자는 숲 전체를 지탱하고 조화롭게 만드는 거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새로운 가치로 나아가는 방식에 있어서의 차이입니다.


니체의 위버멘쉬는 과거의 모든 도덕을 생명력을 억압하는 '노예의 도덕'으로 규정하고, 이를 과감히 파괴하며 나아가는 단절적 혁명을 요구합니다. 위버멘쉬에게 과거와의 결별은 주체적인 삶을 위한 필수 조건이며, "망치를 들고 철학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기존의 우상들을 깨부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가치의 전도가 가능해집니다.

반면 군자는 과거의 지혜를 깊이 익히고 그 속에서 현대에 부합하는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태도를 취합니다. 군자에게 있어 전통은 타파해야 할 구속이 아니라, 현재를 바르게 세우고 미래를 창조할 수 있게 하는 뿌리와 같습니다. 그는 선인들의 도(道)를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함으로써, 단절이 아닌 지속적인 수양과 전승을 통해 점진적이고 조화로운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결론: 지금 현재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니체의 위버멘쉬는 우리에게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을 창조하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타인의 시선과 알고리즘이 짜준 취향에 갇혀 사는 현대인들에게 위버멘쉬는 강력한 자기 해방의 에너지를 줍니다.

반면, 동양의 군자는 우리에게 "당신은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성숙하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군자의 덕목은 타인에 대한 책임과 성숙한 인격의 소중함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위버멘쉬처럼 뜨겁게 창조하고, 군자처럼 차갑게 성찰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삶을 창조하되 그 창조가 타인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 길, 즉 '창조적 군자'의 길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위대한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요?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 ‘아모르 파티’ ...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인간은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가?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10. 15. ~ 1900. 8. 25.)의 가장 유명한 선언인 ”신은 죽었다”는 단순히 종교적 비판이나 무신론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서구 사회를 지탱하던 절대적인 가치, 도덕, 진리 체계가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절대적 기준이 사라진 시대에 인간은 ”도대체


Nietzsche’s Übermensch and the Oriental Gunja(君子)

This article compares Friedrich Nietzsche’s Übermensch (Overman) with the Confucian ideal of Gunja (Exemplary Person, 君子). Both concepts represent a journey of self-overcoming and a focus on affirming present reality over the afterlife. However, they differ fundamentally in their source of value and social orientation.

The Übermensch is a creative rebel who destroys traditional "slave morality" to invent personal values through the "will to power," often embracing solitude to escape the masses. In contrast, the Gunja is a harmonious cultivator who aligns his internal virtues with the universal order (Dao, 道) and "Heaven’s Will." While the Übermensch seeks radical transformation through destruction and play, the Gunja pursues gradual growth through "learning the old to know the new" (Ongojisin, 溫故知新). Ultimately, the text suggests that modern individuals should strive to be "Creative Gunjas"—combining the bold self-creation of the West with the ethical maturity and social harmony of the East.

Keywords: Übermensch, Gunja, Self-overcoming, Nietzsche, Confucianism, Creative Subjectivity, Moral Harm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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