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도구일 뿐, 글쓰기는 여전히 인간의 몫인 이유

AI는 글쓰기의 최고 협력자가 될 수 있다
AI는 글쓰기의 최고 협력자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AI)이 단순한 조수(助手)를 넘어 창조의 영역에 발을 들이면서, 글쓰기 역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챗GPT, Gemini와 같은 AI는 정보 수집부터 초안 작성, 심지어 시나 소설 창작에까지 활용되며 글쓰기의 효율성을 혁신적으로 끌어올렸다. 이로 인해 "글쓰기는 이제 AI가 다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기술적 진보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AI 시대에도 글쓰기의 핵심이 왜 여전히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프롬프트와 AI에는 인간 생각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논리적, 언어적 패턴을 조합하여 글을 생성한다. 그러나 그 능력은 그 안에 담긴 정보와 논리를 모방(imitation)하는 것에 그칠 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거나, 기존에 없던 것을 생각하는 '상상력'을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 즉, AI는 재료를 섞어 요리하는 훌륭한 주방장에 비유할 수 있지만, 그 요리의 재료를 설계하고 메뉴를 창조하는 것은 오직 인간의 몫이다.

글쓰기에서 재료는 바로 '인간의 생각'이다. 인간은 경험과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압박감 속에서 통찰을 얻고, 이를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한다. 이러한 인간의 사유 과정은 프롬프트(prompt)라는 형태로 AI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문제는 프롬프트가 생각을 100%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각은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과 직관, 의식과 무의식이 뒤섞인 그물망과 같다. 반면, 프롬프트는 언어라는 한정된 도구로 재구성된 '생각의 압축본'에 불과하다. AI는 이 압축된 정보만을 가지고 글을 쓸 수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서 인간이 의도한 미묘한 뉘앙스나 배경, 숨겨진 의미는 심각하게 소실될 수 있다.

AI가 글을 작성하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정교한 프롬프트라도 AI는 학습된 데이터의 범주 안에서만 작동하므로, 때로는 엉뚱한 방향으로 글을 전개하거나 핵심 논지에서 벗어난 내용을 추가하기도 한다. 결국 AI가 작성한 초안은 인간의 의도와 얼마나 부합하는지 꼼꼼하게 검토하고, 맞지 않는 부분은 수정하며, 부족한 부분은 보완해야만 한다. AI는 최종 결과물에 대한 책임 또한 지지 않으며, 이 모든 과정은 결국 인간이 '글의 최종 감독'으로서 관리해야하는 몫으로 남는다.

통찰과 창조, 인간 고유의 영역

AI 시대의 글쓰기에서 인간의 역할이 '글의 최종 감독'이자 '진정한 창조자'로 진화한다는 것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비유할 수 있다. 즉, AI가 악기별로 악보를 완벽하게 연주하는 능력(기술자)을 가졌다면, 인간은 그 연주를 통해 어떤 감동을 선사할지 결정하는 지휘자(예술가)의 역할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이러한 인간 고유의 역할은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행위(Action)'와 '탄생성(natality)'이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다. (한나 아렌트는 '탄생성'을 통해 인간이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존재임을 역설하고, '행위'를 통해 그 시작의 잠재력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함으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인격성과 불멸성을 획득한다고 보는 정치철학자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10. 14 ~ 1975. 12. 4.)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10. 14 ~ 1975. 12. 4.)

행위는 단순히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을 넘어, 예측 불가능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능력이다. AI는 이미 존재하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일을 '완수(carry through)'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새롭게 시작(begin)'하는 행위는 오직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관점으로 글을 쓰거나, 새로운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바로 이 '행위'에 해당한다. 이처럼 글쓰기의 본질이 '새로운 시작'에 있다면, AI는 그 시작을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탄생성은 모든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여받는, 새로운 시작의 원리이다. 우리는 이 능력을 통해 AI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스토리'를 발굴하고,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상상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낸다.

인간 고유의 통찰과 창조성이 글쓰기 결과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살기 좋은 새로운 도시를 디자인하라'는 동일한 프롬프트를 사용하더라도, AI를 사용하는 인간 사용자의 통찰에 따라 결과물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누군가 '살기 좋음'을 '도시의 지속가능성'으로 연결하는 통찰을 갖고 있다면, AI가 내놓은 글의 초안을 '탄소 배출 제로'나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 도시'에 초점을 맞춰 수정할 것이다. 반면, 다른 누군가 '사생활의 존중'이라는 통찰을 갖고 있다면, AI가 제시한 글을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극대화하고 서로에게 무관심한 스마트 도시'의 모습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이처럼 AI는 단어의 조합을 제공하지만, 그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깊이를 담을지는 AI를 사용하는 인간의 통찰과 직관에 따라 달라진다. 아인슈타인 역시 인류 최고의 능력을 직관이라고 언급하며, 특수 상대성 이론 검증 등 다수의 상상 실험을 수행하면서 직관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사유를 멈출 때, 우리 글은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

다시 한나 아렌트의 철학으로 돌아가보자.

그녀는 '사유하지 않음''악의 평범성'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악을 낳는다고 경고함으로써 인간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사유하지 않음'이 범죄나 불의(不義), 부정(不正) 앞에서 판단을 멈추고 눈을 감는 것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시스템이나 기술에 모든 판단을 맡길 때에도 발생한다는 점이다.

AI 시대의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AI가 내놓은 결과물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자신의 생각에 맞게 수정하는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주체성을 잃고 AI가 제시하는 편향된 생각에 쉽게 빠지거나, 인간 본연의 사고력을 점차 잃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일종의 '자동화 편향(automation bias)'은 인간의 비판적 사고 능력과 독자적 판단력을 훼손하는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뿐만 아니라 충분히 사유되지 않고 세상에 나온 글의 해악은 인간 개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책과 신문, 광고, 블로그, SNS와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순식간에 전체 사회의 잠재 의식 속으로 깊게 침투할 수 있다. 그것뿐인가. 또 다른 AI에 의해 다시 수집되어 해악이 더욱 강화되거나 교묘해질 수 있다. 글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며, 타인과 소통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사유하지 않으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평범한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
사유하지 않으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평범한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

결국 글쓰기는 단순한 언어 조합을 넘어서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해내는 (그래서 더욱 책임이 따르는) 인간의 고차원적인 사고 행위라고 할 수 있다. AI가 아무리 훌륭한 문장을 만들어내도, 그 문장에 인간의 성찰이 담겨있지 않는 한, 진정으로 의미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AI가 아무리 많은 글을 쓴다고 한들, 그 글이 '나'의 생각과 '나'의 경험을 담아내지는 못한다. AI는 학습된 데이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기존 지식의 재구성에만 머물 뿐 새로운 인류의 질문과 고뇌, 그리고 깨달음을 담아낼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AI를 글쓰기의 '도구'로써 활용하되, 글의 최종 책임자이자, 진정한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최종 승인하는 글에 대한 어마무시한 책임성을 깊게 통감해야 한다. AI가 가져오는 결과물이 사람을 살리는 메스가 될 것인지, 아니면 해치는 흉기가 될 것인지 항상 사유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명령을 받고, 명령에 따랐을 뿐'인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AI가 제공하는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인간 고유의 통찰사고의 깊이를 더하는 글쓰기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AI 시대에 글쓰기가 여전히 인간의 몫인 이유다.

#25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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