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따뜻한 시선은 누군가를 성장시킨다

좋은 칼럼을 읽었다.

글쓰는 변호사 정지우 작가의 '<키다리 아저씨>와 글쓰기의 진정한 효능 [정지우의 잡동사니]>'라는 글이다. 

작가는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 주디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자신의 후원자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면서 성장해가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은 키다리 아저씨의 따뜻한 시선과 환대가 주디로 하여금 편지를 쓰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주디를 키운 건 키다리 아저씨의 따뜻한 시선이었다

한 사람이 성장하는 데는 고독 이전에 타인의 시선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를 바라보며 '기다려줄' 시선이 있어야 한다. 대개 이런 역할은 부모가 하지만, <빨강머리 앤>에서처럼 양부모가 하기도 하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처럼 이웃집 아저씨가 하기도 하며, <키다리 아저씨>에서는 편지를 받아주는 상상 속의 그 누군가가 하기도 한다. 

키다리 아저씨는 단 한번도 주디에게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고, 그 편지에 답장을 한 적도 없다. 하지만 주디는 아저씨가 자신의 편지를 빠짐없이, 관심을 갖고 읽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것은 편지가 단 한번도 반송된 적이 없음이 증거다. 순수한 10대 소녀의 발랄한 상상이 깜찍하고 귀엽기도 하지만, 그게 비단 어린 소녀에게만 해당하진 않을 것이다. 따뜻한 시선과 기대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상대로 하여금 그에 부합하고자 하는 의무감을 지우고, 그에 벗어났을 때 자신 스스로 실망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묘한 힘을 지녔다. 

관심과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 대상을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정도의 수고에는 비용조차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키다리 아저씨'는 그저 편지를 받아만 주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은 단지 대상에 대한 '관심', '믿음' 그리고 작가가 언급한 것처럼 '기다림'으로 충분하다. 나머지는 대상이 알아서 마련하고, 스스로 준비할 것이다. 

공생 리더십, 코칭 모두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 가장 기본이다.

#25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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