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항상 기억해야 하는 이유 (화수미제)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꿇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꿇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동아시아의 주요 3국이자 역사적으로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이들 국가가 있는 동아시아 만큼은 역사가 결코 과거의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 국제 학술회의에서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역사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도깨비방망이는 없다”고 일갈했다. 이는 비단 학술적인 수사가 아니라,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냉정함을 뼈저리게 지적한 것이다. 광복 80주년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라는 거창한 숫자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독도 영유권 주장,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제 동원과 위안부 문제 등 해묵은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왜 우리는 왜 역사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는가? 이 오래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공생 시스템 주역 모델(SSIM)’이라는 렌즈를 통해 동아시아의 현재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역사 문제는 영원히 풀어가야 하는 현재의 문제 (火水未濟)

SSIM의 관점에서 볼 때, 건강한 공생 시스템은 다양성이라는 하괘(下卦)의 토양 위에서 환원이라는 상괘(上卦)의 열매를 맺는 구조다. 그런데 한일 관계, 나아가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분석해보면, 이들에게는 그 다양성의 부분에 식민 지배의 역사라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편한 과거가 놓여 있다. 그것은 주역의 상징에서 보면 깊고 차가운 물, 즉 ‘감(坎)’이다. 감(坎)은 험난한 구덩이이자 물이며, 심연을 상징한다. 또한 제국주의 침탈과 전쟁, 식민 지배라는 20세기의 참혹한 기억이다. 감(坎)은 본래 위험한 것이지만, 동시에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에 집착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심연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바닥까지 내려가 성찰할 때만, 비로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단단한 지혜와 생존의 동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 역시 자신들의 ‘감(坎)’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교육함으로써 유럽 통합의 리더로 거듭난 사례는, 심연이 어떻게 위대한 자산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 일본 정부가 취하고 있는 태도는 이 심연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널빤지로 대충 덮어버리려는 시도에 가깝다. “식민 지배는 부당했다”는 명확한 인식을 흐리고, “이미 끝난 일”이라며 서둘러 덮으려 한다. 하지만 썩은 물은 덮어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부패하여 악취를 풍기고, 결국 시스템 전체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한국과 중국이 끊임없이 일본의 역사 인식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감정적인 몽니가 아니다. 하괘인 ‘과거의 성찰’이 부실한 상태에서는 그 위에 어떤 ‘미래’도 건축할 수 없다는, 역사적으로 쌓아온 직감과 본능의 발로다.

우리가 동아시아라는 공동체에서 바라는 것은 상괘(上卦)에 위치한 ‘리(離)’의 모습이다. 리(離)는 불이며, 밝음이고, 문명이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어주는 ‘미래 지향적 관계’와 ‘공영(共榮)’이라는 비전이 바로 이 불의 형상이다. 하지만 물과 불의 관계는 역설적이다. 물(역사적 진실)이 없으면 불(미래의 신뢰)은 타오를 원동력을 잃게 된다. 반대로 불이 물을 제대로 비추지 않으면 물은 그저 칠흑 같은 어둠일 뿐이다. 감(坎)의 하괘와 리(離)의 상괘가 만나면, 주역의 64번째 괘, 즉 마지막 괘인 ‘화수미제(火水未濟)’가 만들어진다. 즉, 지금의 형국은 아래에는 건너지 못한 역사의 험한 물(감)이 출렁이고, 위에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미래의 밝은 불(리)이 떠 있는 ‘화수미제(火水未濟)’의 상(象)이다. ‘미제(未濟)’는 ‘아직 건너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화해와 공생이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관리하고 노력해야 하는 ‘과정’임을 시사한다.

화수미제(火水未濟) - 끝나지 않는 무한함
화수미제(火水未濟) - 끝나지 않는 무한함

많은 이들이 한일 협정이나 위안부 합의 같은 외교적 문서 한 장으로 역사의 강을 ‘건넜다(既濟)’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SSIM이 보여주는 미제의 괘상은 역사가 고정된 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임을 경고한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던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침묵은 수천 마디의 외교적 수사보다 강력했다. 그는 춥고 축축한 바닥, 즉 역사의 심연(坎)에 자신의 무릎을 적심으로써, 독일이 과거와 단절하지 않고 그 책임을 짊어지겠다는 의지를 ‘빛(離)’처럼 드러냈다. 이것이 바로 미제의 강을 건너는 방법이다. 반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논란이나 역사 교과서 수정 시도는 기껏 쌓아 올린 신뢰의 다리를 스스로 불태우는 행위다. 이는 동아시아의 하괘를 다시금 혼돈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상괘인 공동 번영의 불꽃마저 꺼뜨리게 만든다.

진정성과 신뢰가 역사 문제를 풀어내는 키(Key)

그렇다면 이 불안한 ‘미제’의 상황에서 ‘공생’을 이끌기 위해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인가? SSIM의 논리에 따르면 이때 시스템의 주효(主爻)는 단연코 5효(육오)여야 한다. 화수미제 괘의 5효 효사는 “군자지광 유부 길(君子之光 有孚 吉)”, 즉 “군자의 빛이니 믿음(진정성)이 있으면 길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유부(有孚)’, 곧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과 신뢰다.

화수미제(火水未濟) 육오
화수미제(火水未濟) 육오

바르게 하니, 길하고 뉘우침이 없다. 군자의 빛남이 미더움이 있다. 길하다.

貞 吉 无悔. 君子之光 有孚 吉. (火水未濟 六五)

지금 동아시아에 필요한 리더십은 3효의 무력이나 경제력 같은 ‘힘’도 아니고, 2효의 외교적 수싸움 같은 ‘기술’도 아니다. 바로 5효의 자리에서 일본의, 그리고 한국과 중국의 지도자들이 보여주어야 할 ‘군자의 광명’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요구하는 일본 정부의 일관되고 진정성 있는 인식은 정확히 이 5효의 리더십을 요청한 것이다. ‘일관성’이란 불(離)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는 것이며, ‘진정성’은 그 불빛이 거짓 없이 투명하게 아래의 물(坎)을 비추는 것이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 “법적으로 해결되었다”거나 “몇 번 사과했으니 됐다”는 식의 태도는 5효의 리더십이 아니다. 그것은 거래의 관점이지 공생의 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5효의 리더는 역사의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살피고,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원칙(光)을 세워 주변국들에게 “일본은 다시는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다”는 확신(孚)을 심어주어야 한다. 한국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법적·정치적·도의적 해법을 정교하게 분리하여 접근하는 단계적 지혜가 필요하다. 감정에 휩쓸려 맹목적인 반일로 치닫거나, 반대로 실리를 위해 역사를 헐값에 넘기는 행태는 모두 미제의 강물에 빠지는 어리석음이다.

‘화수미제’는 주역 64괘의 끝이지만, 그것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여우가 살얼음판 같은 강을 건널 때 꼬리를 적시지 않으려 애쓰듯, 우리는 역사의 강을 건너는 데 있어 극도의 신중함과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한일 관계, 나아가 한중일 관계는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미완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미완’을 인정하고, 서로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신뢰의 불을 지피는 과정 그 자체가 바로 ‘공생’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는 이유는, 그들이 딛고 서야 할 하괘(기반)가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역사를 기억만 하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민족에게 평화가 없는 이유는, 그들이 바라봐야 할 상괘(비전)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과거라는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을 것인가, 아니면 그 물을 거울삼아 서로를 비추는 찬란한 불꽃을 피워 올릴 것인가. 그 열쇠는 화려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5효의 자리에서 묵묵히 빛을 발하는 ‘진정성’이라는 리더십에 달려 있다. 그것만이 우리가 이 위태로운 ‘미제’의 시간을 넘어, 진정한 공생의 시대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Why History Must Always Be Remembered: East Asia's Past and Future Through the Lens of SSIM(Symbiotic System Iching Model)

The column analyzes the persistent nature of East Asia's historical conflicts (Dokdo, comfort women, Yasukuni Shrine) using the Symbiotic System I Ching Model (SSIM). It frames the relationship as the Hexagram 64th"Hwasu Mije" (火水未濟), meaning "Before Completion."
The historical pain (colonialism, war) is represented by the Lower Trigram, Kam (Water/Abyss), which must be faced honestly for survival and wisdom, much like Germany acknowledged its past. The desired outcome—a future of co-prosperity—is the Upper Trigram, Li (Fire/Clarity). Japan's denial is seen as covering the abyss, which prevents the "Fire" of trust from burning.
The path to peace requires the "sincerity and trust" (Yubu) leadership of the Fifth Line (六五). This leadership, embodying the "Gentleman's Light," must consistently and transparently acknowledge the past (Water) to maintain the vision for the future (Fire). Peace is not a completed state but an ongoing process demanding moral clarity over transactional politics.


#251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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