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 그 질기디질긴 삶의 껍데기에 관하여

여기에 자동차를 좋아하는 첫번째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사채빚으로 코인 투자를 한다. 직장 동료의 돈까지 빌려 잔뜩 밀어넣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다. 고점에 잔뜩 물린 상태로, 코인가격은 그대로 수직낙하했다. 그의 집까지 찾아온 사채업자는 그에게 딱 한 달의 시간을 남겼다. 휴대폰을 열 때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줄어들어만 간다. 이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뿐이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을 받는 것.
여자를 생각하는 두번째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새로 생긴 애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안절부절 못한다. 근사한 저녁으로도 젊고 예쁜 애인의 마음을 붙잡기엔 한없이 부족한 것만 같다. 오늘 밤 함께 있자는 애인의 말을 거절할 수 없다. 아니 거절하기 싫다. 결국 그들은 외딴 독채 펜션에서 와인을 마셨고, 하룻밤을 보냈다. 하지만 조용하게 넘어갈 순 없다. 술도 덜 깬 상태에서 급한 일이 생긴 그들은 새벽 산길을 위태롭게 운전하다가 결국 어느 육교 아래에서 사람을 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를 등쳐먹는 세번째 남자가 있었다.
그는 고향 여동생이 호구를 잡아 유혹하면 그 약점을 빌미로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는 생양아치 공갈범이다. 술집에서, 호텔바에서, 자전거 동호회에서 공범 여자가 부지런히 대상을 물색해서 타이밍을 잡으면, 그는 여자의 신호를 받고 적절히 나타나 애인 역할, 아는 오빠 역할을 하면서 돈을 뜯어낸다. 약점이 잡힌 남자들 앞에서 세번째 남자는 거침이 없다. 기업 회장이건, 압구정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성형외과 원장님이건 상관없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따끔하게 남자들의 오금이 지리게 만든다. 한방에 몇 백에서 몇 천이 딱딱 계좌에 입금된다. 내용은 조금 많이 불순하지만 참으로 두려울 게 없는 삶이다.
그런데 인연이라함은 절대 가볍지 않다. 티끌만한 무게의 죄가 켜켜이 쌓여 그 업보의 무게로 사람이 짓눌려 죽는다. 넷플릭스 '악연'은 이 부정의 연결고리가 어떻게 물고 물리는지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부터는 본격적인 스포가 시작됩니다>
세번째 남자와 함께 남자들을 작업하던 여자. 그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안절부절 못했던 남자가 바로 두번째 남자였다. 그런데 두번째 남자가 급하게 산길 도로를 타고 내려오면서 치고 말았던 노인은 바로 첫번째 남자의 아버지였다.
정확히 말하면 첫번째 남자의 사주를 받아 연번 조선족 남자와 세번째 남자가 그 아버지를 차로 치었지만 목숨이 그때까진 끊어지지 않았고, 사고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있어서 할 수 없이 몰래 매장하기 위해 옮기던 중, 세번째 남자가 두번째 남자의 사고로 노인이 죽은 것처럼 위장하는 과정에서 사건이 꼬인 것이다. (하~~ 내가 쓰고도 복잡하다. 스토리를 처음 생각해냈던 최희선 웹툰 작가는 진짜 천재다.)
하지만 어찌어찌 두번째 남자는 자신이 멀쩡한 사람을 친 게 아니라, 함정에 빠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애인(세번째 남자의 공범, 이하 여자 공범)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도리어 애인과 세번째 남자에 의해 자신이 납치된다. 하지만 암매장되기 직전에 깨어나 차를 몰아 땅을 파고 있던 애인을 치어 죽인다. 물론 자신도 세번째 남자에게 삽에 찍혀 죽는다.
그런데 그 장면을 사진 찍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자 공범의 고등학교 친구였던 어느 여자 의사가 보낸 탐정들이었다. 그 여자 의사도 끔찍한 사정이 있었다. 자신을 시기질투하던 여자 공범의 모략으로 고교 남자 선배들한테 집단 성폭행을 당했었고, 지금까지 그 트라우마로 하루하루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탐정에게 의뢰해서 당시 강간범들과 여자 공범의 소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바로 셋째 남자의 살인이 목격된 것이다.
악연의 고리는 묘하게 얽혀, 당시 범죄를 주도했던 인물은 바로 첫번째 남자였다는 게 드러난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쓰레기 짓만 골라가면서 하는 양아치 중 상양아치였다. 그런데 세번째 남자의 살인 장면이 경찰에 의해 언론에 공개되면서, 세번째 남자는 아주 큰 빅 픽쳐를 그린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노인 살인의 공범인 연변 조선족이 첫번째 남자의 아버지를 죽여줬음에도 댓가를 받지 못하게 되어 서로 갈등이 생긴 것을 기회로, 연변 조선족과 첫번째 남자를 한꺼번에 없애버리는 계획이었다. 자신과 체형이 유사한 첫번째 남자를 없애 불에 태우고, 자신이 그 신분으로 살아간다는 기발하고(?) 악랄한 계획이었다.
계획은 순차적으로 나름 멋지게 실행된다. 폐건물에서 연변 조선족과 첫번째 남자가 죽어 불에 탔다. 시체도 식별이 안될 정도였다. 세번째 남자는 그들에 의해 납치된 피해자이자 첫번째 남자인 것처럼 행세를 했다. 나름 멋지게 성공했다. 손가락이 화재에 훼손되어 지문도 찍지 못하자 경찰들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첫번째 남자가 살던 원룸으로 세번째 남자가 들어왔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첫번째 남자의 삶은 고작 사채업자가 허락해준 시간이 전부였다. 그 날이 되자, 세번째 남자는 첫번째 남자로 착각한 사채업자들에게 납치되어, 쓸만한 장기만 몇개 남기고 죽게 된다. 그런데 그때 그 작업을 불법으로 진행했던 의사는 바로 성폭행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는 여의사의 동료였다. 그 여의사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의사는 마취제를 사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복수를 해준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인연이 삶에 쌓인다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선한 영향력은 선한대로, 악한 영향력은 악한대로, 자신이 주는 만큼 다시 받아 삶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그 삶의 껍데기를 우리는 지금 어떻게 가꾸고 있는가. 내 삶의 껍데기를 누군가 물려받았을 때, 그는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할까.
최근에 보았던 넷플릭스 작품 <폭싹 속았수다>에서 양관식의 아들이 그 아버지의 인간됨과 품성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서는 장면이 있다. 아버지가 새겨놓은 삶의 껍데기를 그 아들이 입고, 전과자로 낙인찍혀 사그러져가는 삶을 다시 살린 것이다. 이 질기디질긴 삶의 껍데기를 우리는 결코 가볍게, 쉽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다. 악연이 아니라 좋은 인연이 차곡차곡 쌓인 아름다운 옷으로 만들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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