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게임'> 사랑은 전염된다

<'스파이 게임'> 사랑은 전염된다

(아래 내용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상대를 믿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믿지 못하는 사람과의 사랑은 십중팔구 비극으로 끝난다.

그래서 누군가를 속이고 자신을 숨겨야하는 스파이들에게 인간적인 감정은 잘 어울리지 않다. 그들에게 우정이나 사랑은 사치일 수 있고, 때로는 무기일 수도 있다.

은퇴를 앞둔 베테랑 요원 네이선 뮈어(로버트 레드포드 役) 역시 그런 사람이다. 그는 필요하다면 동료 톰 비숍(브래드 피트 役)과 그 애인 앞에서 감추고 싶은 그녀의 과거를 까발려버리는 재수없는 짓도 거리낌없이 한다. 그건 모두 비숍이 포섭되는 걸 막고, 임무의 성공을 위해서 한 일이다. 그는 그 만큼 임무만 생각했던 냉철한 스파이였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혐오하며 떠나버린 비숍을 위해 인생을 걸었으니, 그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스파이 게임'(Spy Game, 2001)은 아무도 믿지 못하는 스파이 세계에서 인간적인 '감정'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보여주는 실험과도 같은 작품이다. 아주 오래 전인 2001년도에 나왔던 작품임에도 굉장한 흡입력으로 스토리에 빠져들게 한다.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류와 다르게 액션은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CIA 회의실에서 이루어지는 치밀한 두뇌게임과 뮈어와 비숍의 과거 회상으로 작품을 끌어간다. 감독이 의도하는 바가 비교적 분명하므로 내용이 그리 어렵지는 않으나, 나는 살고 살리는 생(生)의 관점에서 작품을 보게 되었다.

월남전에서 위험한 상황임에도 멋지게 저격임무를 수행하고 부상당한 동료까지 부축해서 돌아오는 비숍을 CIA 요원으로 발굴하고 키운 것은 뮈어였다. 뮈어가 비숍을 요원으로 생(生)한 것이다. 하지만 비숍은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음에도 태생적으로 스파이는 맞지 않는 인물이다. 스파이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것이다. 몰래 호송하던 인물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그는 인간적으로 갈등한다. 또한 이중 스파이일 지도 모르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으며, 한 명의 테러리스트를 제거하기 위해 수십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감수하는 상황에서는 작전을 계획했던 뮈어를 혐오하며 떠나고 만다.

뮈어가 비숍의 소식을 다시 들었던 것은 은퇴하는 당일 사무실에서였다. 비숍이 임무 수행중에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독자행동을 감행했고, 그 과정에서 중국 당국에 체포된 일이 발생했던 것. 하필 미국 정부는 중국과 무역 협정을 앞두고 있어 외교적 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비숍 체포건을 은폐하고자 했다. 비숍은 24시간 내 처형이 예정되어 있었고, 정보 당국은 공식적으로 비숍은 이미 사망한 인물이라며 연관성을 부인했다. 

이때부터 비숍을 살리기 위한 뮈어의 진정한 스파이 게임이 시작된다. 비숍에 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자신을 두고 추궁하는 CIA 수뇌부들을 상대로 역으로 정보를 빼낸다. 현재 어디에 수감되어 있는지 확인되자 그는 CIA 국장의 직인을 위조하여 작전을 개시한다. 그 과정에서 평생 모은 은퇴자금까지 중국의 전력 회사 간부를 매수하는 첩보 자금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은퇴 자금을 모두 써버리는 것은 무모하고 미련한 짓이다. 회상 대목에서 뮈어가 비숍에게 돈에 관해서 충고하는 장면이 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평온하게 은퇴하고 싶으면 타인에게 절대 돈을 받지 말라"는 걸로 기억한다. 이처럼 부정한 돈은 멀리했을 뮈어이니, 남은 돈이라곤 은퇴 자금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뮈어는 국장의 직인까지 위조한다. 평온한 은퇴는 커녕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이쯤에서 궁금하다. 무엇이 냉철하고 이성적인 뮈어를 움직였을까. 단순한 옛동료에 대한 동료애일까. 아니면 그 이상인가.

그 힌트는 바로 비숍이 선물로 준 휴대용 술병에 있다.

그것은 베이루트 작전 때 비숍이 생일선물로 자신에게 준 것이다. 맛있는 식사를 하기 위해서라면 총탄이 날아다니는 거리를 지나도 상관없다는 인간적인 비숍이다. 그러한 비숍이 위험천만한 베이루트에서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고 준 선물은 단순한 선물 이상이었다. 어느 리뷰에서 그것은 언제 어디에서나 술을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있는 삶을 바란다는 비숍의 마음이 담겨있는 상징물이라는 글을 읽었다. 충분히 공감가는 해석이다. 사람을 속일 수 밖에 없고, 때로는 자신을 믿는 사람을 버려야 하는 비정한 일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다움은 잃지 말라는 비숍의 사랑이다. 그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뮈어는 비숍이 위험한 작전을 몰래 수행할 정도로 구출하고 싶었던 인물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그녀는 바로 자신이 깨버린 비숍의 사랑이었다. 영국과 중국의 이중 스파이로 지목되어 중국 교도소에 억류된 그녀를 비숍은 몰래 구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기꺼이 그 사랑을 보여주었으며, 사랑을 지키기 위해 인생을 걸 수 있는 멋진 사람.

뮈어는 비숍을 스파이로 생(生)했지만, 뮈어의 인간다움을 다시 살려낸 것은 비숍의 사랑이었다. 진실한 사랑의 모습이 냉혈한 스파이를 따뜻한 인간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왜 뮈어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스파이 게임>은 시간을 초월하는 정말 멋진 작품이다.

#250442


Read more

문자는 문명을 기록, 보존, 전승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미지출처 : 나무위키)

'진화'한 알파벳 보다 '설계'된 한글이 우수한 이유 (feat. 세계에서 유일하게 직접 글자를 만들어낸 나라, 대한민국)

문자가 정의하는 문명의 정체성과 기록의 힘 문자는 인류의 지적 성취를 규정하는 기호학적 정점이자, 문명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전략적 자산입니다. 인류 문명 곳곳에서 문자가 발명되어 활용되어왔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류사에서 사용된 수많은 문자 중 대다수는 수천 년에 걸쳐 서서히 형태를 갖추어 온 ‘진화의 산물’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 민족의

치매가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내 자산을 내가 지키기 힘들어진다는 점에 있다. (사진출처 : FREEPIK)

치매 걸리면 내 통장 누가 지키나? 2026년 도입되는 '치매 공공신탁' 미리보기

내게 만약 치매가 온다면 ... 내 자산 관리는 어떻게 하지? 은퇴 후 노후 대비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건강관리입니다. 특히 치매와 같이 인지능력이 저하되거나,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운 상황이 된다면, 가장 걱정되는 점은 누가 나를 대신하여 경제적으로 케어해줄 것인가일 것입니다. 가족이 있다면 그래도 낫겠지만, 가족이 없거나 있더라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보살핌이 어려운 경우,

시민단체에서 쿠팡 탈퇴를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 : 서울뉴스통신)

쿠팡은 왜 '한국 기업'이기를 포기했을까? (feat. 쿠팡 탈퇴했다가 2주 만에 느낀 '중독' 증상)

쿠팡 중독을 체험하다 매출의 90% 이상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기업. 창업주가 1978년 서울 서초에서 태어난 한국인이었던 기업. 세계에서 가장 못살던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다면서 회사의 미래 성장성을 한국인의 DNA에 두었던 기업. 누구나 다 아는 쿠팡(주)의 이야기다. 이처럼 우리나라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쿠팡이라는 회사가 이제는 미국에 상장된 미국법인임을

2026년 1월 22일 세계 최초로 대한민국에서 인공지능 기본법이 시행되었다. (이미지출처 : FREEPIK)

AI 이미지 쓰면 3천만 원 과태료? 2026년 인공지능기본법, 개인 블로거도 워터마크 필수일까?

최근 AI로 생성한 이미지나 글을 블로그에 활용하시는 분들 많습니다. 그런데 2026년부터 시행되는 '인공지능기본법' 때문에 "나도 모르게 법을 어겨서 과태료를 내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AI 생성물 워터마크 의무화' 소식에 수천만 원의 과태료가 언급되면서 개인 블로거분들의 근심과 우려가 큽니다. 지혜나무숲 역시 해당하는 문제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