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의 철학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인생의 가치 중 하나가 바로 '포기'임을 깨달은 것은 얼마되지 않은 일이다.

포기만큼은 포기하지 마라는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진실임에는 틀림없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말이다.

 

우리는 사는 동안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자신의 한계를 미리 인정하지 말라고. 지레 겁먹고 내려놓지 말라고.

끝까지 투쟁해서 목표를 쟁취하라고.

목표가 주는 묘한 도전욕 위에 포기하면 안된다는 도덕적(?) 당위성이 얹어지면

포기하는 것은 실패하는 것이고, 실패는 나쁜 것이라는 

선과 악의 구분 비스무리한 잣대가 보이지 않게 나를, 내 삶을 재단하게 된다.

그래서 만약 실패라도 할라치면 마치 커다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자책하곤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포기했기 때문이라면 뭘 더 말할 게 있을까.

 

하지만 나는 이제 내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다.

'포기하지 않음'은 과연 옳은 일일까. 

 

나는 프로그래밍 광(狂)이다. 

주무기는 엑셀 VBA와 파이썬(Python). 

순.수.하.게. 독학했다.

 

프로그래밍은 필요에 의해서 익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필요를 찾아놓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익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만큼 프로그래밍이 정말 좋았다.

주인의 정확한 오더만 있다면 아주 유능하고 충직한 종으로 부릴 수 있는 컴퓨터는 언제나 내겐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물론 정확한 오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오더가 필수지만 말이다.

중학교 시절 XT 컴퓨터로 나는 BASIC은 물론이고, 그 어렵다고 소문난 어셈블리, C까지 두루두루 맛보았다.

호기심과 필요에 의해 시작한 프로그래밍은 날 밤을 새서 작업하는 엄청난 집중과 몰입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체계적이지 못했던 지식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종종 부딪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내 발목을 잡을 때마다 나는 막강한 끈기와 시행 착오로 난관을 돌파하곤 했다.

문제가 생기면 하루고 이틀이고 매달려서 결국은 돌파해내는 무시무시한 습관.

처음에는 이 습관이 비전공자인 내가 프로그래밍에 자신감을 얻게하는 막강한 강점이었다. 실제로 많은 성과도 얻을 수 있었다.

적어도 프로그래밍에서는 내가 집중해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없었다.

특히 인터넷 검색이 일상이 된 지금은 더욱 그렇다. 결국은 해결책을 찾아냈고, 결국은 뛰어넘었다.

 

하지만 문제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건 시간과 마음이었다.

변수명이 잘못된 경우와 같이 어이없는 실수를 찾아내느라 하루, 이틀이 훌쩍 지나갔다.

내가 그것만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닌데, 작업하다보면 시계가 돌아가는 게 눈에 보인다.

꼼짝없이 의자에 앉아 몇 시간을 보내니 몸에도 무리가 왔다.

이제 내 나이 건강을 신경써야 하는 나이인데, 멈출 수 없었다.

분명 나는 중독되어 있었다.

가끔 현타를 맞고, 강제 중단을 단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멈춘다는 것은 도저히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몸은 다른 것을 하지만 머릿속은 문제해결로 가득찼다.

머릿속 사고마저 중단시키려고 하면 우울증 비슷한 감정이 솟아났다.

기분도 예민해져서, 조금만 주변에서 성가시게 해도 가슴 속이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분명 중독이었다.

 

최근 내겐 비슷한 경험이 또 있었다.

이곳 블로그가 돌아가는 서버 프로그램의 테스트 코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같은 조건과 같은 코드임에도 에러가 발생했다.

프로그래밍은 수학 문제처럼 초기값과 산식이 동일하면 반드시 결과값이 동일해야 한다.

만약 에러가 나거나 결과값이 다르다면 무언가 알고리즘에 오류가 있다는 얘기다.

그것은 컴퓨터가 아닌 인간인 프로그래머의 잘못일 확률이 99.99% 이상이다.

 

나는 왜 실행이 되지 않는지, 해당 테스트 코드의 문제를 하나씩 뜯어보기 시작했다.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문제가 생기면 결국 돌파해내던 성공의 DNA가 나를 더욱 세차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물론 밥은 먹고, 잠은 잤지만 내 머릿속은 문제를 해결할 그 다음 대안으로 가득차 있었다.

대안1을 적용해보고, 그 다음 대안2, 대안3, 대안4...... 연거푸 실패했다.

또 하루가 지났다.

아무런 소득없이, 새로 얻은 지식도 변변치 않고....

몸은 뒤틀리는 느낌이고, 신경은 예민해져서 짜증을 내고...

무엇보다 허무가 밀려온 건 문제를 해결한다한들, 내 프로그램의 써드 파티 라이브러리가 변경되면,

이 작업을 다시 할 지 모른다는 자각때문이었다.

이게 뭐라고...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한 '문제 해결을 위한 무식한(?) 돌파'가 옳은 것임을 스스로 입증하려면

시간과 상관없이 될 때까지 온 정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인디언 기우제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뛰어넘지 못하는 거대한 벽을 언젠가는 마주칠 터.

그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일 말고, 더 가치있고, 귀한 일을 해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만약 '포기'한다면 그로 인한 불안과 불편함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여기에서 포기해야 하나. 아니면 조금더 몰아부쳐야 하나.

 

스스로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결국 나는 깨끗하게 '포기'했다.

나도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내가 해야 하는 부분과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나누었다.

이번 문제는 후자에 속한다. 

그러니 나는 과감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내려놓고 나니 보인다. 

그 목표가 얼마나 작은(?) 일인지.

포기를 했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포기를 했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아이들의 밥상머리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고, 

삶의 빈틈과 여백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내겐 포기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되었다.

현명하게 그리고 제대로 포기할 수 있는 삶이 되려면 분명한 철학과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이루어진 포기는 절대 실패일 리 없다.

현명하게 포기하는 것은 이른 봄 과실수의 가지치기처럼,

내게 남은 진짜 가치의 살을 찌우고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지혜롭고 필수적인 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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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0. 6 작성,  2023. 10. 6. 까지 총 1회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