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1)




맹자 양혜왕(상) 7장을 살펴보자.

처음에는 양혜왕, 그 다음은 양혜왕의 아들인 양양왕이 등장하였는데 이번 장부터는 제선왕이 등장한다. 당시 제나라는 위나라와 버금가는 상당한 국력의 나라였으며, 제선왕은 당대에 있어서 만큼은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선왕은 맹자를 포함한 제자백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선진(先秦)문화의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다만 이웃 연나라를 침공하는 일로 연나라의 원한을 샀고, 이로 인해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 직전까지 가게 만든 일이 있었는데, 그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齊宣王問曰:「齊桓、晉文之事可得聞乎?」
제선왕문왈 : 제환, 진문지사가득문호?

제선왕이 물었다. "제환공, 진문공의 일을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제환공, 진문공은 중국 춘추시대 패자였던 군주들이다. 제선왕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그 생각이 살짝 엿보인다.

 

孟子對曰:「仲尼之徒 無道桓文之事者,是以後世無傳焉。臣未之聞也。無以則王乎?」
맹자대왈 : 중니지도 무도환문지사자, 시이후세무저언. 신미지문야. 무이즉왕호?

맹자가 대답했다. "공자의 학파에서는 제환공과 진문공의 일을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때문에 후세에 전해진 것이 없어서, 신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꼭 말하라 하시면 왕도정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道가 흔히 아는 길이 아닌 '말하다'의 의미로 쓰였다. 그래서 無道桓文之事者는 번역 순서가 (7無)-(5道)-(1桓)-(2文)-(3之)-(4事)-(6者)가 된다.

제선왕은 패자에 대해서 물었는데, 맹자는 자신은 모른다면서 왕도정치를 얘기한다고 한다. 맹자의 테마는 기승전 왕도이다. 사실 맹자와 같은 대사상가가 이전 시대의 역사와 주요 인물인 제환공, 진문공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모른다고 얘기한 것은 제선왕이 천하의 패권을 잡으려면 제환공 등과 같은 패도정치가 아닌 왕도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함이다.

 

曰:「德何如,則可以王矣?」
왈 : 덕하여, 즉가이왕의

(제선왕) 말하길, "덕이 어떠해야 왕을 할 수 있습니까?"

 

何는 '어찌', '어떠한'의 의미이고, 如은 '~과 같은'의미다. 그래서 何如가 되면 '어떻게 같으면', '어떠하면'이다. 그 앞에 德이 붙어서 주어로 사용되면, '덕이 어떠하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단 덕을 말하는 것을 보면 제선왕이 왕으로서 자질이 전혀 안되는 사람은 아닌 듯 하다.

 

曰:「保民而王,莫之能禦也。」
왈 : 보민이왕, 막지능어야.

(맹자) 말하길, "백성을 보호하며 왕 노릇을 하면, (누구도) 그것을 막지 못합니다."

 

백성이 하늘이고, 왕의 진정한 권력의 원천이다. 맹자가 지금까지 강조했던 내용이다.

 

曰:「若寡人者,可以保民乎哉?」
왈 : 약과인자, 가이보민호재?

(제선왕) 말하길, "과인같은 사람도 백성을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왕임에도 불구하고 겸손하다. 일단 배우려는 자세는 인정할만하다.

 

曰:「可。」 曰:「何由知吾可也?」
왈 : 가. 왈 : 하유지오가야?

(맹자) 대답하길, "가능합니다.". (제선왕) 말하길, "어떤 이유로 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由는 이유를 뜻한다.

맹자의 답이 매우 단순하고 명쾌하다. 제선왕의 어떤 부분을 보고 저렇게 단정짓는 것인지, 아직 맹자를 읽지 않은 사람들은 꽤 궁금할 것이다.

그 이유로 제시되는 사례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상당히 유명한 대목이다. 제선왕은 인간으로서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맹자 양혜왕(상) 7장의 중간 부분이다.

지난 부분에서 맹자는 제선왕이 충분히 왕 자격이 있다고 얘기했다. 오늘 살펴볼 부분은 맹자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관한 설명이다.

 

曰:「臣聞之胡齕曰,王坐於堂上,有牽牛而過堂下者,王見之,
왈 : 신문지호흘왈, 왕좌어당상, 유견우이과당하자, 왕견지,

(맹자가) 말하길, "제가 호흘에게서 듣기로는, 왕께서 당상에 앉아계시는데, 소를 끌고 당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께서 그것을 보시고는..

 

한자를 알고 있다면 해석이 크게 어렵지는 않다.

"有牽牛而過堂下者"만 살펴보자. 牽(견)은 '끌다'의 의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견우와 직녀에서 견우의 한자가 牽牛이다. 바로 소를 끄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한 의미를 알고 있다면 이 문장은 (8有, 있었다)-(2牽, 끌고)-(1牛, 소를)-(3而, 그리고)-(6過, 지나가는)-(4堂, 당)-(5下, 아래에)-(7者, 사람이) 순으로 쉽게 해석된다.

호흘(胡齕)은 제나라 신하의 이름이다. 군주의 평소 성품에 대한 일화를 그 신하로부터 맹자가 들었나 보다.

 

曰:『牛何之?』對曰:『將以釁鐘。』王曰:『舍之!吾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
왈 : 우하지? 대왈 : 장이흔종. 왕왈 : 사지! 오불인기곡속, 약무죄이취사지.

왕께서 "소가 어디로 가는가?" 물으시니, 대답하길 "종에 피를 칠하러 갑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왕께서 "놓아주어라. 내가 죄도 없으면서 사지로 가면서 벌벌 떠는 것을 차마 보고 견딜 수가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釁(흔)은 '피칠하다'의 의미다. 흔종은 종을 주조할 때, 희생(犧牲)의 피를 종에 발라 신에게 제사 지냈던 행사였다. 舍(사)는 '버리다'의 의미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놓아주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觳(곡)과 觫(속)은 '잔뜩 움추리다', '벌벌 떨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는 "吾不忍其觳觫"을 살펴보자. (1吾, 나는)-(5不, 못한다)-(4忍, 참지)-(2其, 그)-(3觳觫, 벌벌 떠는 것을)로 해석하면 자연스럽다. 이처럼 한문은 어순이 영어와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 그 점을 참고하면 한문 해석이 더 쉬워질 것이다.

 

對曰:『然則廢釁鐘與?』曰:『何可廢也?以羊易之!』不識有諸?」曰:「有之。」
대왈: 연즉폐흔종여? 왈 : 하가폐야? 이양역지! 불식유저? 왈 : 유지.

"그에 대하여 대답하길, / 그러면 흔종 의식을 없앨까요? / 어찌 없애겠느냐. 양으로 바꾸어라.라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진짜 있었습니까?" 네, 있었습니다."

 

종에 피를 칠하는 행사에 소가 끌려가면서 슬피 우는 것을 보고, 제선왕이 그것을 말렸다. 하지만 그 행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양으로 바꾸어 진행하라고 한다.

소나 양이나 똑같은 짐승인데, 그것을 바꾸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 싶기는 하다. 이에 대해 맹자는 어떻게 해석하는지 살펴보자.

 

「是心足以王矣。百姓皆以王為愛也,臣固知王之不忍也。」
시심족이왕의. 백성개이왕위애야, 신고지왕지불인야.

이 마음은 왕 노릇하기에 충분합니다. 백성은 모두 왕이 (소를) 아껴서 그런 것으로 여기겠지만, 저는 진실로 왕께서 차마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맹자는 왕도정치를 행할 자격이 있다면서 제선왕을 의기양양하게 칭찬한다.

사실 소나 양이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가축으로서 다를 바가 없다. 여기에서 봐야할 점은 소는 그 울음소리를 듣고 제선왕에게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소를 양으로 바꾼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 지 여부는 일단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딱한 상황에서 왕에게 측은한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 때문에 어떤 조치를 취했다는 점, 그것을 맹자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사실 전국시대와 같이 전쟁을 일삼는 시대에서는 백성이 한낱 정복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백성을 생각하는 군주 자체가 찾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제선왕은 인간에 비해서 미물에 불과한 소의 울음소리를 듣고, 소를 딱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다. 맹자는 군주가 이러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왕도정치를 할 수 있는 충분한 바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王曰:「然。誠有百姓者。齊國雖褊小,吾何愛一牛?即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故以羊易之也。」
왕왈 : 연. 성유백성자. 제국수편소, 오하애일우? 즉불인기곡속, 약무죄이취사지, 고이양역지야.

왕이 말했다. "그러합니다.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 백성들이 있겠지만, 제나라가 비록 좁고 작아도, 제가 어찌 소를 아끼겠습니까. 다만 벌벌 떨면서 죄없이 사지로 가는 것을 차마 참지 못했기에, 양으로 바꾸게 한 것입니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짐승이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며 떠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생명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바탕이 되어있는 사람일 것이다. 군주가 그러한 사람이라면 왕도정치를 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본은 갖춘 셈이다.

짐승에게도 불인지심을 갖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그에 대한 맹자의 답을 살펴보자.

 

曰:「王無異於百姓之以王為愛也。以小易大,彼惡知之?王若隱其無罪而就死地,則牛羊何擇焉?」
왈 : 왕무리어백성지이왕위애야. 이로역대, 피오지지? 왕약은기무죄이취사지, 즉우양하택언?

맹자가 대답하길, "왕께서는 백성들이 왕이 아껴서 그렇다고 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었으니, 어찌 백성들이 그것을 알겠습니까? 왕께서 죄없이 사지에 끌려가는 것을 측은히 여기셨다면, 소와 양을 어찌 선택하셨습니까?"

 

異는 '다르다', '괴이하게 여기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惡는 '어찌', '어떻게'의 의미이다. 隱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의미한다.

여론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당시 백성들이 왕이 소를 아껴서 그랬다고 오해했을 지라도, 사건의 발단이 왕 내심의 측은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문제없는 것이다.

 

王笑曰:「是誠何心哉?我非愛其財而易之以羊也,宜乎百姓之謂我愛也。」
왕소왈 : 시성하심재? 아비애기재이역지이양야, 의호백성지위아애야.

왕이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진실로 어떤 마음인가? 내가 그 재물을 아껴서 양으로 바꾼 것은 아니지만, 백성들이 내가 아껴서 그랬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宜는 '당연하다', '마땅하다'의 의미다.

군주의 결정을 가지고, 백성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오해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 마저도 품어줄 수 있어야 진정한 군주다. 왜 내 생각을 모르는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지 상대를 몰아붙인다면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맹자의 지적과 격려에 새로운 관점에서 백성을 이해하는 제선왕의 모습을 보면, 맹자가 언급한 것처럼 군주로서의 자질은 갖춘 모양이다.

 

曰:「無傷也,是乃仁術也,見牛未見羊也。君子之於禽獸也,見其生,不忍見其死, 聞其聲,不忍食其肉。是以君子遠庖廚也。」

왈 : 무상야, 시내인술야, 견우미견양야. 군자지어금수야, 견기생, 불인견기사, 문기성, 불인식기육. 시이군자원포주야.

말씀하길, "괜찮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을 베푸는 방법입니다. 소를 보시고 양을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군자는 짐승에 대하여, 살아있는 것을 보고, 차마 죽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소리를 듣고,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仁術은 인을 베푸는 방법, 기술을 말한다. 君子之於禽獸也는 (A) 之於 (B) 也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A는 B에 대하여'라고 해석하면 된다. 庖廚는 포주라고 발음하는데, 푸주의 원말이다. 푸줏간을 의미한다.

제선왕은 제사에 쓰일 소를 양으로 바꾸었다. 생명으로서 소나 양이나 모두 같지만, 맹자는 제선왕을 긍정하며, 소는 보았지만,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부분은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내 인식의 범위에 들어온 상태에서 인을 행하는지 그렇지 못하는지에 관한 자세에 대한 평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우리는 지구상 많은 지역에서 전쟁과 자연재해로 헐벗고 굶주리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들을 모두 도울 수는 없다. 능력 밖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 범위에 구체적인 사건으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을 가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면 도울 수 있다. 인식하지 못하는 다른 나라의 기아 난민은 돕지 못하더라도 비난받을 이유는 없지만, 내 눈 앞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한다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사건에 대하여 나는 인을 베풀어야 하는 도덕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맹자는 제선왕의 그 점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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